즐거운 세상

백두산과 압록강 여행기

Edwin Kang 百祥 2006. 8. 1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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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상 중국 여행을 자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애국심이 생겼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 하기에, 호기심과 질투 그리고 부러움에 대한 반신반의(半信半疑)한 마음으로 중국 서민들의 생활상도 보고, 얼마나 넓은 땅인지 확인도 해보자는 속샘으로 2002년 8월에 심양에 있는 거래 회사 직원들과 함께 가족여행을 계획하였던 일이 있습니다.

먼저, 심양에 도착하여 백두산까지 승용차와 봉고차로 20여명이 함께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보슬비가 쉬지 않고 내리는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거쳐, 그들이 얘기하는 장백산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자연경관을 구경하다가 컴컴해져 차에서 잠을 자기도 하면서, 지내온 20여 시간은 정말로 지루하다 못해 온 몸이 쑤시고 아플 정도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어 도착한 장백산에는 그때까지도 보슬비가 꾸준하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백두산(장백산) 정상에 올라가는 것이 힘들 것이라는 안내자의 말에 자포자기 할 정도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지를 볼 수 없더라도 여기까지 왔으니, 어떻게라도 올라가자고 채근하였습니다.

그 결과, 택시로 백두산 정상 100m정도 아래 장소까지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쉬지 않고 내리던 비가 멈추었습니다.

그야말로, 말로 다 형언하기 힘들 정도의 감동적인 현장, 바로, 맑고 푸르게 펼쳐진 천지와 백두산의 장엄한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우리 가족 모두는 감동을 받곤 한답니다.

 

백두산 여행을 마치고 심양으로 돌아와 다시, 심양에서 야간 침대 기차를 타고 북경에 도착하니, 아침이었습니다.

중국 친구의 여동생이 마중 나와서, 시작된 자금성, 이화호 그리고 만리장성 등을 여행하는 동안은 참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현장을 보면서, 인상 깊은 가족여행이 되었던 일이, 새삼 즐거움을 더하게 합니다. 사업상, 부득이 하게 혼자서 동남아를 여행 할 때 보다, 정말 기억에 많이 남는 여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심양에서 일을 보면서도 구경 할 생각도 안했던 고궁을 돌아 보다보면, 옛 선조들의 얼이 숨겨져 있는 것을 느낍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장관님들이 청나라에 찾아가서, 우리나라 임금의 칙서를 전하고, 청나라 황제의 칙령을 받아야했던 장소라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여기에서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더군요. 무엇이냐고요? 생각해 보세요!

요즘 얘기하는 자주와 자존이 없는 상황, 타국(청나라)의 황제에게서 속국으로 전락하여 중요한 집행은 청나라 황제의 결제를 받았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일제의 침략 도발도 치욕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우리의 잃어버렸던 주권이 없는 시대 보다 동등한 입장에서의 자주를 통해 주권을 지킬 수 있는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 더 분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중국과 인접한 압록강과 두만강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정서의 대상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민족의 발흥지(發興地)였던 이곳이, 고조선과 고구려 시대의 초창기에는 “민족의 젖줄”이라 불리었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끼고, 만주일대에서 청나라가 중국 땅을 다스리던 근대에는 외부로 나아가는 통로이자 넘어야 할 장벽이기도 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1938년에 나온 대중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이 지금도 한국인 애창가요의 선순위를 다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느끼는 감정은 남다르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을 따라, 2006년 7월 21일 저녁때, 비가 오는 굳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업자 일행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가 압록강 상류에 세웠다는 수풍댐의 현장을 관광하기 위하여 중국쪽의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 상류를 따라 여행하면서, 북한의 실정을 어느 정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블로그에서 생활속의 사진으로 “인간의 비극보다 압록강의 자연은 아름다웠습니다”라는 제목의 사진으로 보여 드린 바 있지만, 이는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얕은 녹색과 푸른빛이 찬란하고, 물안개가 피어나는 아름다운 압록강을 따라 올라 가는데, 유람선에서 눈으로 보이는 중국과 북한의 현실들은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어 보였습니다.

군인들의 보초 방법에서부터 촌락의 구성 형태나 가옥의 구조 등도 각각 달라 보였습니다. 중국군의 보초는 눈에 보이지 않고 자유스러워 보이는 한편, 북한군은 띄엄띄엄 떨어져있는 초소에서 탈북자를 경계하는 것으로 보였으며, 반갑게 손을 흔들어도 무반응의 경색된 자세가 가슴을 답답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 높지 않은 야산에는 나무가 하나도 없었고, 산꼭대기까지 옥수수가 심어져 있으며, 조금 험하여 옥수수를 심을 수 없는 산에는 작은 나무와 무릎을 덮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풀들로 덮혀 있었는데, 그곳에서 사복한 군인들로 보이는 병사들이 야생 식물을 채취하여 초소로 들어가는 모습과 강변에서 긴 어망으로 물고기를 잡고 있는 모습은 그들의 생활상이 말로만 들었던 것보다 심각함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 되었습니다.

 

압록강 상류 중간쯤에는 6.25 당시, 중국에서의 물자 보급을 막기 위하여, 연합군이 파괴하였다는 다리가 있었으며, 그 곳을 지나니, 지금도 중국으로 드나든다는 철길 옆에 북한군 초소는 을씨년스럽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중국군 압록강사령부를 지난 곳에 우리나라의 가평에 있는 남이섬처럼, 위락지와 휴양지 형식으로 보기 좋게 자리한 중국쪽의 작은 섬에는 한가로움과 평화로움이 가득한 곳이 눈에 띄었습니다.


배에서 하선하여, 다시 중국의 단동으로 승용차를 타고 내려오는 강가에는 순찰하는 것으로 보이는 북한군을 50M 정도의 지척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역시 손을 흔드는 우리를 외면하고 달아나는 모습에서, 그들이 폐쇄적이고 경색된 행동은 너무나 커다란 안타까움보다 불쌍함이 앞서곤 하였답니다.

여기에서, 북한이 폐쇄되지 않고 개방하는 것만이 “악의 축, 폭정의 전초기지, 도둑과 같은 독재․부패 정권”으로 지목받는 국제사회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며, 국민을 배불리 먹고 잘 살도록 만드는 부강하고 평화로운 국가로 정착 할 수 있는 방안임을 깨닫고 따르면서, 개방 하여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독일인들은 오데르-나이세 강에서 실감할 수 있는 민족 발원지를 폴란드에 일부 양보하여, 서독과 폴란드가 화해와 반성으로 이어가는 중대한 결정을 하였으며, 통일 독일을 만드는 또 하나의 근원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성숙한 독일의 역사인식을 깨닫게 됩니다.

이에, 우리도 압록강과 두만강, 한강과 임진강의 발원지는 분명히 대한민국의 평화를 기원하는 발원지가 되도록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천박한 말이나 덮어씌우는 말 그리고, 왜곡하는 말들이 우리 사회를 황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다같이 인식하여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순화된 행동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2006년 8월 17일 작성

압록강 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