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前, 내가 살던 시골에는 꽁보리밥에 무말랭이 무침, 그리고 군내가 풀풀 나는 묵은 김치를 밥과 함께 당시, 밴또(일본말)라 불리는 알미늄 도시락에 담아서, 책보자기로 책과 함께 둘둘 말아 어깨에 메고 학교에 도착하면, 김치 국물이 흘러 책과 노트를 적셔 흘러든 냄새가 코끝을 꽤뚫고 지나갑니다.
그렇게라도, 소외 밴또를 가지고 가지 못하는 아이는 삶은 고구마를 가져오는 아이도 있고, 도시락을 아예 가지고 오지 못하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래도 부자집 아들이자 장남이라서 어머니께서 도시락은 꼭 챙겨 주셨습니다. 그때마다, 도시락이 없는 아이를 위해서, 담임선생님은 모든 아이들에게 “누구의 밥과 반찬이 맛있는지(!) 맛 좀 보자”고 하시며, 찬압이라는 큰 그릇을 놓고, 거기에 한 두 수저씩 담아 보라는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득 담겨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두 수저 드시고는 “모두 맛이 있다”하십니다. 곧바로, “나 혼자 다 먹지 못하겠구나!” 하시면서, 몇몇 사람을 불러 모아서 같이 점심을 먹곤 하였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도시락이 없는 친구들을 불러 모았던 것입니다.
나누는 온정을 가르치신 “김명환” 5~6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미, 고인이 되어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그 은사님의 따스한 정만은 언제나 저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지금 같아선, 영악한 아이들 속에서 자칫 왕따를 당할 법도 한 일이였겠지요. 그러나 마냥, 즐겁게 지내던 친구들이었습니다. 구김살 없이 서로 더불어 사는 세상을 가르쳐 주었던 초등학교의 도시락 추억입니다.
어쩌다, 돼지고기 볶음을 가지고 가는 날에는 목소리에 힘이 붙어서, 같이 먹자고 외쳐 대기도 했답니다. 그를 알고 있는 어머니는 별도로 동그란 나무 찬압에 쌓아 주셨기 때문에, 친구들과 즐겁게 먹을 수가 있었고, 그것이 즐거웠습니다.
그중에 부끄럼이 많은 녀석은 늘 혼자 먹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눈물의 도시락을 먹지나 않았나(!), 아니, 같이 먹어주는 친구가 없었기에 바꿔 먹을 반찬이 없었으니까(?) 혼자 조용히 먹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철없었던 그 시절이 부끄럽습니다.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 초등학교를 마치고, 시골에서 도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유학을 온 것입니다.
시골 깡촌에서 올라온 더벅머리 중학생……!!! 초등학교 친구들과 떨어져 생면부지의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서, 열심히 공부하며 생활했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하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숙집은 건어물 가게를 하는 집이어서, 반찬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과 반찬을 자주 나눠 먹곤 했었습니다. 계란프라이 정도가 더 붙은 반찬으로 꽤나 생색도 냈지만, 사실 녀석들의 입에 반찬이 맞았나 봅니다.
그렇게도, 정겹게 지내던 친구들에게 무말랭이와 시디신 김치가 어찌 그리 입에 딱 붙던지(!),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쌓인 정에 힘입어, 지금은 정겨웠던 추억 속에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세월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콩자반, 멸치볶음, 어묵, 감자조림, 가지무침, 돼지고기 볶음 등에 지금도 선뜻 손길이 가지 않는 반찬들입니다. 어머님께서 초·중·고교시절 아들의 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시락과 반찬으로 고집했던 탓이겠지요!
지난해, 어머니께서 병상에 계실 때에 도시락 얘기를 꺼냈습니다. 다른 아이들 보다 보리쌀이 적었고, 똑같은 반찬이라도 훨씬 더 맛깔스러웠다고 하시며, 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은근히 자랑 하시는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어머니는 6남매의 도시락을 거르지 않는 것이 중요 했으며, 쌀밥과 보리밥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던 그 시절에 대단함을 강조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고집과 쌀농사와 밭농사에서 얻어진 그리 넉넉하지 않은 돈으로 여덟 식구가 굶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매일 끼니를 거르게 될까봐, 속 태우며 살았던 얘기를 듣노라니, 내가 늦게 철이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며, 고생하신 어머니의 품에 안겨, 때늦은 회한의 눈물만 쏟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옛날 도시락 추억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지금의 학교 급식으로 “학교에 도시락을 가지고 가거나 배달하는 추억도 없어진다”며, 부모님이 겪은 옛날 얘기 보다는 현대에 사는 우리는 학교 급식의 부작용을 얘기하는 진풍경이 연출 될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지금, 바뀌어 가는 문화에 회안으로 웃음꽃을 피웠답니다. 보온 도시락은 이웃의 손에 넘어 간지가 오래 되었으며, 학생들에게 무거운 책가방과 도시락 그리고 도시락을 준비하는 번거로움도 학교 급식으로 바뀌는 새로운 생활문화가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식중독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관청이나 사대부집에서 차(茶) 심부름 등 허드렛일을 하는 천민여성으로 서, 의녀수업을 받았으나 성적이 부족하여 질병치료를 맡기기에는 부족한 초학의(初學醫)들에게 대부분 다모(茶母)를 맡겼다고 합니다. 포도청이 다모(茶母)들에게 규방 염탐이나 여성 피의자를 수색 하는 등 지금의 “여형사”쯤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보여 집니다.
이 제도가 지금의 모범 여성경찰들에서 선발하여 주는 “다모(茶母)대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성을 굿이 바로 잡자고 한다면, 지금의 “식품의약청” 정도에서 다모를 활용하는 방법으로 부작용을 없애는 지혜를 갖추어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되는 영예로운 도시락이 만들어 지기를 기대합니다.
[2006년 7월 17일 강석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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