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뜸과 동시에 꼬리치며 반갑게 맞는 별이와 두리의 얘기로 시작하렵니다.
두리는 아버지요, 별이는 딸의 사이입니다.
그런데, 별이가 생리를 하게 되니까 두리는 발정을 시작합니다.
조금 빨리 수술을 해서, 중성으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 속에 속알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 인간의 생각에서, 부녀지간에 부도덕한 일이 일어날까 염려가 되어, 격리 수용키로 의견의 일치를 모았습니다.
또한, 격리하는 데에도 두 놈의 습성을 고려 하기로 한 것입니다.
두리는 영역표시를 가끔 하기 때문에 집에 놓아 두고, 개인 사무실에 별이를 두기로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녀지간을 생이별 시킨다고 생각하니, 저의 마음에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답니다.
두리와 별이가 아침 일어나거나 놀다가도 가끔은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두놈이 얼굴을 부벼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녀지간에 불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인 샘이지만, 그러한 모양을 보았기 때문에, 더욱 애처로운 마음이 드는 것을 보니, 나 자신 또한 키우면서, 두리와 별이에게 정이 들었던가 봅니다.
안쓰럽고 애처로운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집을 나설 때에 별이가 먼저 나서서 “나가지 말라”는 듯이 짖어대기 시작하면, 두리도 맞장구라도 치듯이 같이 짖어 대었는 데, 출근 할 때에 조용히 처다만 바라보는 두리를 보려니, 짝 잃은 외 기러기 같은 생각에 더욱 안타까운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두리가 시무룩하게 나를 경계의 눈으로 바라 볼 때면, 별이를 데려다가 나쁘게 한줄 알고, 그렇게 멀근하게 처다만 보는 두리 놈이, 나에게 원망하는 듯하여 더욱 더 애처롭게 느끼지곤 하였답니다.
또한, 사무실에서 잠자거나 노닐고 있던 별이가 나를 보자마자 꼬리치며 달려들 때면, 딸아이의 재롱같은 느낌이 든답니다.
밤세워 홀로 있었기 때문인지, 안아주면 떨어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도 가까운 사람과 떨어졌다가 만나면 반갑듯이, 짐승에게도 늘 보던 사람과 떨어져 있다가 만나면 반갑게 맞이하는 사랑의 표현에는 동일한가 봅니다.
그렇기에, 개도 어린 아이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두리가 밥을 잘 먹지 않고, 가끔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바라 볼 때면, 나는 웃음과 함께 말 못하는 짐승에게 너무 과한 행동을 했는가(?)하는 반성과 함께 이상야릇한 감정을 갖게되니, 내 또한 정이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럴 때면, “며칠만 참아라. 별이를 데려다 줄테니까!”하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려들면서, 밖을 바라보는 두리를 보게됩니다.
말은 못하지만 생각은 왠만한 사람과 별다름이 없다는 생각에 영물이라는 선인들의 말이 뇌리를 스치곤 하였답니다.
결국, 며칠을 참지 못하고 병이 났습니다.
먹지도 않고, 약간 푸른 물을 토하는 것입니다.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는 데, 스트레스성으로 보이니까 설탕물만 먹이다가 죽을 써 주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플 때에 처치하는 것처럼 얘기 하기에,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발정을 자제하는 약을 주면서, 같이 놓아둬야 빨리 나을 것이라는 답이었습니다.
보고싶은 상사병에 떨어 뜨려 놓으므로 받는 스트레스가 병을 만들었던 모양입니다.
안되겠다 싶어서 별이를 데려다가 함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병이난 두리는 구토가 멈추지 않은 관계로 밥을 먹지 않습니다.
왠일 일까요! 별이도 애비인 두리가 밥을 먹지 않는 것을 보고, 근심어린 눈초리를 하면서, 나만 처다 보면서, 두놈이 밥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동물에게도 부녀지간의 정이 있는 것일까요?
애뜻하게 느끼고 있을 즈음에 저의 생각은 "베 고푸면 먹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지켜만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두 놈이 물만 먹고 있다가 두리가 치유 되어갈 즈음에 조금씩 밥을 먹게 되어서야, 따라서 밥을 먹는 별이의 효심을 보게 되었답니다.
그렇기에 우리네 일상생활에서도, 우리의 사랑으로 좋은 일을 만들거나 황폐한 것에서 나쁜 일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자책감에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답니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나도 모르고 상대방도 모르는 사이”라고 말한 어느 강사의 말이 생각납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 수 있다면, 모든 일에 대처할 수가 있기 때문에 훨씬 부드러울 터인데, 그렇지 못한 일에서 당황하거나 대처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수대교 붕괴참사,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사고, 여러 가지의 교통사고, 우리들의 입을 통해서 아무렇게나 내벧는 말 한마디가 자신을 망치는 사건들, 지나친 행동으로 남에게 원망을 듣거나 패가망신하는 사건들 말입니다.
자나깨나 불조심이 아니라 자나깨나 말조심 그리고, 자나깨나 언어와 행동조심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가장 먼 사이는 머리에서 가슴까지 30Cm사이라고 말한 강사님의 말이 가슴을 조이게 합니다.
머리로 생각하여, 행동하고 가슴으로 전달되는 시간이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역시, 제일 오랜 시간을 요 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시골에서 몸이 아픈 할아버지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예쁜 신발 하나를 사주고 싶은 데, 못사줘서 미안하다고 손녀에게 말했답니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얘기하는 것을 들은 자식이 돈이 없어 하는 아버지를 안타깝게 여겼기에, 도시에 나가서 일을 하고, 돈을 모아 자식의 신발을 사가지고, 집에 도착해 보니, 아버지가 세상을 하직한 것입니다.
서로의 한풀이가 되지않은 상태로 생을 마감 했으니, 얼마나 아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레서, 그는 “가슴으로 울었더니, 때는 늦었다”고 말하고는 자녀를 위해 도시로 이사하여, 부자가 됐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새로운 스피드 행복시대를 실감하게 합니다.
서로 통하는 것이 말하는 것일까요?
얼마 전에 “공명현상”에 대한 말을 듣고, 상통하는 하나님의 세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느 환자의 피를 뽑아 검사하고 나쁜 피로 판명 되었기에, 그 상태로 저장했답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 그 환자가 완쾌 되었습니다.
그레서, 그 사람의 피를 뽑아 환자 당시의 피와 대조 해 보기로 하고, 실험을 위해서, 환자 당시의 피와 완쾌한 시점의 피를 검사할 때에 놀라운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환자 당시의 피나 완쾌한 시점의 피가 같은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분명, 환자 당시에 저장된 피에 이상을 발견하였는 데, 완쾌한 시점에 있는 피와 동일한 피로 바뀌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어떻게, 바뀌었을까(!)하는 점에 공명현상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픈 사람이 건강한 사람에게 자신이 아픈 부위와 동일한 곳에 손을 대고 주무르면, 아픈 사람의 아픈 부분이 낫는다는 기이한 공명 현상에 대한 얘기를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나의 내공과 다른 사람의 내공이 통한다는 증거입니다.
나와 상대방이 편향되지 않고, 서로 잘 통하는 즐거운 사이가 되기를 바라는 진실한 마음입니다.
이를 비유해 보면, 우리를 지배 하시는 하나님께 말하여, 통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평안을 가져다 주고, 지혜를 주시며, 바른 행동으로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겸손과 사랑이 샘솟게 됩니다.
그렇기에, 변화와 혁신 그리고 창의적인 사고와 자신의 건강한 사고를 키워가는 행복의 가치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찾으시기를 기원합니다.
<2008년 7월 4일 대표의견 청취 시에 느낀 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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