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26일 예비역 해병으로 구성된 기독해병 선교회(회장 : 박환인 장로)는 현역 해병을 위로하고, 친정집 같이 연결되는 전통의 해병정신을 고취하고자, 해병대사령부를 방문하였습니다.
해병대 부사령관을 역임하신 박회장(예비역 해병 소장)님과 이상로 사령관(해병 중장)은 해군사관학교 선후배이기도 합니다.
이를 인연으로 군악대와 의장대를 사열하는 모습과 의장대 시범을 보노라니, 옛날 군생활 시절에 젖어 회안의 시간을 생각하면서, 감동의 환희에 젖었습니다.
또한, 해병 박물관을 견학하는 과정에서, 전통의 해병 역사와 갖가지 시련을 목도하는 저의 마음 속에, 우리 인생과 함께하며,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회안을 생각하게 되었기에, 해병의 전사 아니 역사를 소개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보시고, 인생의 뒤안길을 더듭어 보시고, 새로운 기회를 찾는 전기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해병대가 걸어온 길을 전개 했습니다>
①해병대 창설(1949.04.15) :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과 여ㆍ순 반란사건의 전훈에 따라 수륙양면 작전의 필요성이 높아, 1949. 4. 15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를 창설 하였다. 그 뒤 1949. 5. 5 대통령령 제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었다. 당시 초대 사령관 신현준 중령 휘하 380명은 해군에서 편입한 장교26명과 하사관 54명 그리고 병 300명(해군 13기에서 특모한 해병대 병1기생)으로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 한다’는 해병대 정신으로 해병대의 굳건한 초석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1949. 8. 1장교와 하사관을 해군에서 증원 받고, 해군 14기 중 440명을 해병대 병 2기로 특모하여, 해병대는 2개 대대 규모로 증편하여, 맨 처음 제주도에 사령부를 설치했습니다.
신현준 사령관은 창설 당시 훈시를 통하여, 정병 육성을 강조하면서, 교육훈련 이념을 제기하였다.
첫째, “해병대는 일치단결하여 유사시를 대비하여 교육훈련에 정진하자”
둘째, “민에는 양이 되고 적에게는 사자가 되자”
셋째,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자유를 수호하는 역사를 창조하자”고 하였다.
창설기에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강인한 훈련의 연속으로 ‘해병혼’과 ‘정신’을 주입하였으며, 그 결과 한국전쟁 시 상승불패의 해병대 정신을 갖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 특히 정신적, 육체적 도장으로 삼아왔던 천자봉 구보와 행군은 오늘날까지 해병대 장병들에게 긍지를 갖게 하는 훈련으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②진주(경남) 주둔(’49.8~12) :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1949년 8월 29일 진주로 이동하여, 약 4개월 동안 진주에 주둔하면서, “백성 없이 전투 없다”는 표어로 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온갖 노력을 경주하여 치안확보, 민심수습, 선무공작 활동 등을 전개하면서, 지리산을 근거지로 진주지역 일대에 출몰하는 공비 소탕 작전을 실시하여, 진주지역을 완전히 평정함으로써, 해병대를 처음으로 국민에게 알렸다.
③해병대 군가제정(‘49.9) :「나가자 해병대」군가는 창설 초기 독특한 해병대의 노래가 있어야 한다는 간부들의 의견이 대두되자, 해병대 참모장 김성은 중령을 위원장으로 1949년 9월에 군가제정위원회에서 제정하였다.
신영철 해병이 작사한 초고를 수정하여, “나가자 해병대”가를 최초의 군가로서 제정하였고, 김행래(당시, 경찰악대장)씨가 작곡하였으며, 다시 이병걸씨가 군악으로 편곡하였는데, 한국전쟁 시 ‘해병혼’과 ‘정신’을 갖게 한 해병대 군가로 부르게 되었다.
(군가) : [①우리들은 대한의 바다의 용사, 충무공 순국정신 가슴에 안고, 태극기 휘날리며 국토통일에, 힘차게 진군하는 단군의 자손, 나가자 서북으로 푸른 바다로 조국건설 위하여 대한 해병대.
②창파를 해치며 무쌍의 청룡, 험산을 달리는 무적의 해병, 바람아 불면 불라 노도도 친다, 천지를 진동하는 대한 해병혼, 나가자 서북으로 푸른 바다로 조국건설 위하여 대한 해병대.
③ 백두산 봉우리 폭풍이 불고, 태평양 검은 구름 굽이치어도, 우리의 젊은 피가 약동하는 곳, 원한의 삼팔선도 부서지리라, 나가자 서북으로 푸른 바다로 조국건설 위하여 대한 해병대]
④제주도 주둔(‘49.12~’50.7) : 해병대는 1949년 12월 29일 진주에서 제주도로 이동하여 제주읍 부대와 모슬포 부대로 증편하여, 한라산을 중심으로 준동하는 공비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제주도는 4.3사건 뒤 전화가 회복되지 않았으며, 군에 대한 원한과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해병대는 초기에 공비토벌 작전보다 선무공작과 민심수습으로 의료진료 시설 복구, 농번기 대민 지원, 주민 계몽활동을 실시하여 물심양면으로 피폐한 30만 도민들에게 재기의 힘을 주는 한편, 생활면에서 안정을 되찾도록 인도하였다.
특히, 제주공비 토벌작전은 육군 제9연대와 제2연대, 경찰, 서북청년단이 토벌하지 못한 한라산 공비를 소탕하는데 성공하였다.
⑤장항・군산・이리지구 전투(‘50.7.15~7.21) : 북괴의 남침으로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해병대는 1950년 7월 초 천안을 점령한 북괴군 제6사단 제 13연대가 서해안을 우회하여 호남지역으로 남하할 때, 해병대 고길훈 부대는 제주기지를 떠나 7월 16일 군산에 상륙, 장항 북쪽으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북괴의 금강 진출을 저지, 격파하였고, 7월 20일까지 군산, 이리 방면에서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적의 남침을 저지하였다.
⑥진동리 지구 전투(’50.7.31~8.13) : ‘50. 8. 3 경남 진동리 서쪽 고사리에서 북괴군 제6사단 정찰대대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적 제6사단의 예봉을 꺾어 침공을 저지하였으며, 창군 이래 최대의 전공을 세워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다. 동년, 8월7일부터 미 육군 제25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된 킨(kean)특수임무부대가 진주고개로 지향된 대규모 반격작전(1950.8.7~8.12)을 전개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진동리 마산 간의 보급로를 타개하고 야반산, 수리봉, 서북산 일대의 적을 완전히 격퇴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튼튼히 구축하는데 기여하였다.
⑦통영 상륙작전(50.8.17~9.22) : 낙동강 방어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북괴군 제7사단이 거제도를 점령하고 전략 요충지 마산과 진해를 해상에서 봉쇄하기 위하여 통영에 침입하자,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1950. 8. 17일 18:00. 7척의 해군 함정의 지원 아래 장평리 해안에 한군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2일 만에 전술 요충지 통영을 탈환한 뒤, 원문고개에서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고 이 지역을 방어하였다.
이 작전에서 해병대는 작전의 승패를 가름하는 매일봉 고지를 적보다 5분 먼저 점령하여,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적을 격멸하고, 통영 시내의 잔적을 소탕하면서 적의 유일한 공격로인 원문고개를 조기에 탈취 확보하여, 여러 차례의 공방전에서 적 대대를 격퇴함으로 써, 낙동강 교두보선의 서측방 위협을 제거하였고, 유엔군 철수작전 중 방어를 위한 유일한 공격작전을 수행하여‘귀신 잡는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⑧인천상륙작전(’50.9.15~9.20) :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괴군 최후의 발악적인 8~9월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한 작전으로 맥아더 사령관은 한반도에서 적을 몰아내고 조기에 전쟁을 종결한다는 계획 아래 1950. 9. 15 유엔 제7합동상륙기동부대가 261척의 대 함대를 동원하여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를 선두로 세계 전사에 천연히 빛날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에 제7합동상륙기동부대는 48시간 동안 항공모함 함재기 200대의 공중 폭격과 함포 사격을 실시하면서, 9.15 06:30 미 해병대 제5연대 제3대대가 20척의 상륙주정으로 녹색 해안에 상륙, 월미도를 탈취하였다. 동일 17:30부터 한·미 해병대가 400여 척의 상륙주정에 분승하여 4회에 걸친 파상공격을 실시, 적색 해안과 청색해안에 상륙하여, 인천을 방어하는 북괴 인천 경비여단과 제18사단 및 제31사단을 격파하고, 인천 시가지와 해안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수도 서울을 조기에 탈환, 낙동강 전선의 총반격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하였다.
⑨서울탈환작전(‘50.9.20~9.28) : 인천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미 제10군단은 1950. 9. 18 서울로 진격하여 11일 동안 작전을 전개한 끝에, 서울 외곽 지역과 시가지에서 북괴군 4개 사단(제9사단, 제18사단, 제25여단, 독립 제78연대)을 격퇴하고 서울을 탈환하였다.
이 작전에서,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는 선봉부대로 서울 서측방에서 수도 중심부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미 육군 제7사단과 한국 육군 제17연대는 서울 남측방과 동측방에서 우회, 포위 기동으로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한국 해병대는 9. 20 한강을 도하, 수색방향으로 진격한 뒤 최후 방어선인 104고지와 연희고지군 일대의 적을 격퇴하여 수도탈환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며, 시가지 전투를 전개하여 잔적을 격멸하고, 9. 27 06:10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90일 동안 적의 점령 아래 있던, 서울을 탈환하고, 9. 29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환도식을 거행하였다.
⑩북진. 철수. 재 반격작전(’50.10~‘51.1) : 1950. 10. 1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한ㆍ만 국경해산진까지 북진할 때, 해병대는 1950. 10. 7인천을 출항, 묵호 및 원산에 상륙하여 고성ㆍ원산ㆍ함흥지구 전투를 수행하였다.
1950. 10. 25 중공군이 불법 개입하자 원산ㆍ함흥을 철수하여, 진해에 집결한 해병대는 1950. 12. 20 제1연대와 독립 제5대대로 재편성하였다.
1951. 1. 4 수도 서울이 다시 적의 수중에 함락되자, 해병대는 재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영덕ㆍ안동ㆍ홍천ㆍ화천지구 전투를 수행하였다.
⑪도솔산지구 전투(’51.6.2~6.20) : 국군과 유엔군이 1951년 5월 춘계 공세를 격퇴한 직후,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양구군 해안면의 해안분지 남서쪽에 있는 전략 요충지 도솔산(▲1,148)을 확보하기 위하여, 제1단계 작전(1951. 6. 4~6. 12)으로 점령한 캔사스 선으로 진출하였고, 제2단계 작전(1951. 6. 13~6. 24)으로 추가 점령하여 버지선까지 진출하므로 서, 도솔산과 대우산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산악지역에 배치된 북괴군 제5군단 제12사단과 제32사단의 정예부대를 치열한 공방전과 무수한 희생 끝에 격퇴하고, 도솔산을 탈환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이 도솔산을 방문하여 ‘무적 해병대’라 칭하면서,‘무적 해병’ 휘호를 하사하였고, 1951.8.19 제1연대에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하는 신화를 창조한 전투이다.
1951. 6 .4 도솔산 탈환에 실패한 미 해병대 제5연대와 임무 교대한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암석지대를 이용하여 수류탄과 중화기로 무장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고, 주간 공격을 야간 공격으로 전환하여 결사적인 돌격작전을 감행하는 등 난공불락의 진지를 혈전 17일 동안 피와 땀으로 얼룩진 끈질긴 공격 끝에 24개 목표를 점령하였다.
6. 20 드디어 빛나는 개가를 올림으로써, 적 2개 사단을 격퇴하고, 교착상태에 빠진 우군 전선의 활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⑫김일성고지(펀치볼) 전투(‘51.8.30~9.3) : 휴전회담이 제기된 직후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양구 북쪽 해안분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지형상 불리한 조건을 무릅쓰고, 3주간 피의 대공방전을 감행하였다. 제1단계 작전(‘51. 8. 21~9. 1)시 현,을지 전망대와 가전리 일대에 배치된 북괴군 제3군단 제1사단을 치열한 혈전 끝에 격퇴하고, 펀치볼을 확보하였으며, 제2단계 작전(’51.9.1~9. 20)시에 간무봉 일대의 적 은거지를 제압하여, 내금강산을 통제할 수 있는 중요지형을 장악하였고, 좌측방의 한국 육군 제5사단의 가칠봉 점령을 용이하게 하였다.
한국 해병대의 김일성 고지(▲924) 및 모택동(▲1026) 전투는 펀치볼 작전의 제1단계 작전으로 펀치볼 북쪽 능선 일대에 천문학적 숫자의 지뢰가 매설된 장애를 극복하고, 4일 동안 924고지와 1026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전 끝에 이곳을 탈환함으로 써, 펀치볼을 조기 확보하게 되었고, 한국 해병대의 위용을 국내외에 크게 과시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신인이 경탄할 공훈’이라 격찬하였다.
⑬김포지구 전투(’51.3.7~‘53.7.27) : 1950. 9. 21 수도탈환 작전에 참가한 해병대 제3대대는 김포비행장을 공격하는 적 2개 대대를 격파하고, 김포·강화도를 장악하였다.
1951.1.24 영덕ㆍ안동지구에 출동하여 북괴군의 남침 진로를 차단하던 해병대 독립 제5대대는 1951.2.26 수도 서울 재 수복작전을 전개하여 인천에 상륙, 잔적을 소탕하고, 인천시를 방어(1951. 2. 26~3. 6)하면서, 서울 영등포 일대에 정찰대를 파견, 서울 재 수복 작전에 기여하였다.
1951. 3. 7부터 김포지구 작전을 전개하여 잔적을 소탕하고, 김포반도를 완전 장악한 뒤, 휴전 시까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중공군의 수도 서울 침공을 저지 하면서, 한강 너머 개풍군 및 개성 부근 일대에 정찰대를 전개하여, 월암리 전투 등 50여 회의 작전을 수행하고, 한강을 사수하여 수도권 방어에 기여하였다.
⑭장단(사천강)지구전투(’52.3.17~‘53.7.27) :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최될 당시, 더 유리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초 진지 쟁탈전이 계속되자, 수도 서울 방위에 역점을 두고, 군사적 보완책의 일환으로 1952.3.17.부터 중동부에서 서부전선 장단지구로 투입된 해병대 제1연대는, 1953년 휴전시 까지, 약 1년 4개월 동안 판문점에서 사천강에 이르는 임진강 하구까지 11km에 달하는 주저항선 전방의 8개 전초진지에서 중공군 2개 사단(제194,제195사단)과 대결한 방어 전투이다.
해병대 제1전투단을 이 전투에서 사천강을 경계선으로 중공군 2개 사단과 네 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여, 군사 분계선을 아군에 유리하게 확정짓도록 하였고, 수도 서울의 관문인 개성-문산 축선을 지켜 수도권 방어에 기여함으로써, 대통령 부대 표창과 신익희 민의원 의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⑮교육단 창설(’53.2.1) : 한국전쟁 직후 1953. 2. 1 해병학교 및 해병훈련소를 기간으로 편성된 해병 교육단은 독자적인 해병대의 장교, 하사관, 병을 양성하기 위하여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식 교육훈련으로 강인한 해병을 창출하는 산실 역할을 수행하였다.
⑯제1해병 여단 창설(’54.2.1) : 제1 전투단을 중심으로 제1여단을 창설, 파주군 금촌면에 주둔하면서, 조직을 정비하여, 서부전선 및 방어임무를 수행하였고, 1954년 3월 17일 미 해병대 제1사단의 본국 철수로 작전지역 작전권을 인수했다.
⑰제1 상륙사단 창설(’55.1.15) : 1955.1.15 제1여단을 기간으로 제1상륙사단을 창설하여 수도권 방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상륙 훈련을 실시하였고, 1959.3.12 금촌에서 포항으로 이동하여, 상륙작전 임무를 본격적으로 수행하였다. 1959. 3. 30 대통령령 제1,468호에 따라 제1 상륙사단으로 정식 승인을 얻어, 유일한 국가전략 기동부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⑱도서부대 창설(’55.2.1) : 동해안의 여도, 모도, 사도, 황토도, 웅도, 양도부대와 서해안의 초도, 석도부대가 휴전협정에 따라 진해로 철수하여, 해병 제2연대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나, 백령도와 연평도에 주둔했던 서해부대는 계속 잔류하여 서해안의 5개 전략도서 방어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54.3.1 미 해병대가 본국으로 철수함에 따라 작전권을 인수하였다.
그 뒤, 서해도서부대(1955.2.1), 해병함대부대(1958.4.15), 함대 해병경비부대(1959.4.1), 해병 도서경비부대(1960.1.1)로 개편된 도서부대는 1971년1월 작전 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분대본부에 참모실로 보강하고, 1973년 10월에는 해병도서 경비부대로 증편되었으며, 1974년 3월 1일에는 도서방어 부대로 증ㆍ개편되었다.
⑲해병대사령부 용산으로 이전(’55.3.26) : 해병대는 1949. 4. 15 진해에서 창설되었다. 창설한 지 불과 1년여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도에 주둔한 해병대사령부는 전추부대와 함께 부산 인천 서울 고성 원산 진해로 이동하면서, ‘귀신잡는 해병대’, ‘무적해병’의 위용을 떨치고 1951. 5. 20 부산 용두산 공원으로 이동하였다.
이렇듯 싸우면서 자라온, 해병대사령부는 휴전 뒤 1955. 3. 26 부산에서 서울 후암동으로 이동하여 해병대 부대 지휘부대로서 부대의 발전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보급 정비단 창설(’55.6.1) : 1955.6.1 창설한 보급 정비단은 해병대 전 부대에 대한 독자적인 보급 및 정비지원을 위하여, 각종 보급품의 청구ㆍ획득ㆍ저장 및 불출에 관한 전쟁기능과 해병대 군수물자의 3, 4단계(LVT는 4. 5단계)정비를 담당하였으며, 전시 작전부대를 위한 전방전투 근무단을 편성하여, 전투 근무지원 임무를 수행하였다.
특히, 차량, 공병, 통신, 정비교육과 병참 물자의 생산(LVT 재생) 및 기술검사, 이동정비를 실시하면서 무기, 장비, 물자의 폐품처리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해병대 월남전(청룡부대) 파병(1965.10.9~1972.2.29) : 1964.8.3 정부와 국회는 공산침략에 직면한 자유 월남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국군의 월남 파병을 결정하였다.
해병대는 1965. 9. 20 제2여단 청룡부대를 창설하여,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전투부대로서, 최초로 이 부대를 외국 원정군으로 파월하였다.
1965.10.9일 캄란에 상륙한 청룡부대는 뚜이호아지구 작전, 해풍작전, 추라이지구 작전, 짜빈동 작전, 호이안지구 작전, 고노이섬 작전, 베리아반도 상륙작전 등을 수행하면서, 6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 조국의 명예와 해병대의 용맹성을 발휘하여 ‘신화를 남긴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해병대 사령부 해체(’73.10.10) : 군의 유신과업수행을 위한 군 본연의 사명을 충실히 완수하고 군의 전투력 위주로 정비를 강화하여 자주국방 태세를 조속히 확립하며, 국가 자립 경제발전을 위해 경제적인 군으로 관리 운영하기 위하여 1973.5.29 대통령 본부사항 및 1973. 7. 10 해병대 운영개선에 관한 국방부 훈령 제157호에 의거 해병대 효율적 운영을 위해 해병대사령부가 해군에 통폐합 되었다.
해병대 사령부 재창설(’87.11.1) : 해병대사령부의 재창설에 따른 권한과 책임한계가 법적으로 보완되지 못하여, 해병대 인력 관리사의 문제점 및 개선방안을 보고하고 법률 제정을 추진한 결과, 1990.8.1 국군 조직법에 해병대 관련사항을 재입법화함으로 서, 부대령부대와 그 위상이 다른 직제령부대로서, 해병대사령부가 해병대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연합 해병사령부(’92.12.1) : 사령부 재창설 후, 1992.12.1 해병대 부대를 상륙작전 위주로 운영하고, 모든 예하부대를 지휘하고, 연합사 전략 예비부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연합 해병대사령부(CMFC)가 창설됨으로 서, 제1사단과 제6여단의 작전권을 포함한 지휘기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다목적 신속 대응군으로 써, 연합해병대를 창설 국가보위의 핵심전력으로써 평시에는 상륙전력을 구축 전쟁을 억제하고, 유사시에는 적 후방에 강력한 상륙전력을 투입하여 전승에 기여 국가정책을 지원한다.
해병대사령부 발안이전(’94.4.6) : 1987.11.1 재창설된 해병대사령부는 해군본부 부속 건물인 기지병원을 개축하여 사용하던 중, 1988.4.15 재경부대 교외 이전계획에 의거, 경기도 서해안으로 해병대 사령부 이전을 결정하고, 52개 지역을 대상으로 33회 검토하여, 현 위치인 화성군 봉담읍 형제산 하록에 사령부 위치를 결정한 후, 백년대계의 이전 사업을 추진하였다.
현재, 사령부 신청사는 1992.4.1 기공하여, 1994.4.6 준공 이전함으로 써, 해병대 전통정신을 계승하고, 미래 지향적인 해병대 역사를 창조하는 요람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령부 이전 지역을 살펴보면, 진해 ⇨ 제주도 ⇨ 진주 ⇨ 제주도 ⇨ 부산 ⇨ 인천 ⇨ 서울 ⇨ 고성 ⇨ 원산 ⇨ 진해 ⇨ 부산(용두산) ⇨ 용산(후암동) ⇨ 해병대 해체 ⇨ 대방동(해군본부-재창설) ⇨ 발안으로 이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가한 예비역 해병 선교회 회원과 사령관을 위시한 사령부 령관 장교와 한컷 했습니다.>
[앞줄 오른쪽 첫번째가 본인(강승규-예비역 해병병장)이며, 5번째가 해병대 부사령관, 6번째가 이상로 사령관(해병 중장) 7번째가 박환인(전, 해병대 부사령관 예비역 소장) 선교 회장, 8번째가 이봉출( 예비역 소장)회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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